션즈화의 조선전쟁 22, 미국의 인천상륙작전이후 스탈린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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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모택동 스탈린.jpg

스탈린의 지시

  1. 9월 18일 바실리예프와 스티코프에게 전보를 보내 김일성에게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 4개사단을 서울 교외지역으로 이동배치하라고 지시했다.

  2. 이와 함께 소련국방장관 비실렙스키 원수에게 소련 공군이 평양 상공을 방어할 수 있는 계획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면서 소련 극동 변경지역과 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공군부대 중 전투기 중대 몇개와 레이다 및 방공부대를 평양주위의 비행장에 배치하하고 지시

3 소련 무장부대 부총참모장 자하로프를 대표로한 특별대표단을 조선에 파견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
“부산 방어권에 대한 진격을 중지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모든 부대를 철수하여 동해안과 동북부 전선으로 이동배치하고 서울을 방어하라”
(255, 주 27 Alexandre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 16-Oct. 15 1950: New Evidence from the Russian Archives, CWIHP Bulletin, No. 6-7, 1995/1996, pp.95-96)

상기한 스탈린의 조치는 그동안 미국과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회피하려고 했던 이전의 행동과 어긋나는 것이었음. 얼마후 스탈린은 직접적인 소련 공군을 투입하는 방안을 포기

  1. 9월 27일 전문을 보내 조선군의 일선 사령부, 집단군 사령부와 각 부대의 군사지휘계통의 지도자들을 질책하면서 전술부분에서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 소련 군사고문들이 이런 실수에 대해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질책하면서 탱크의 전술적 운용에서 멍청한 짓을 했으며, 정보업무에서도 무지했다고 지적

상황악화의 원인이 스티코프와 소련 군사고문단이 ‘적의 인천상륙작전의 전략적 의미를 무시하고 부정한데 있다’고 강조함.

상황에 대한 경시와 전략적 관점의 부족이 남부지방에서 서울로 부대를 이동시킬 필요에 대해 회의적으로 반응하게 했고 부대의 이동 자체도 상당히 지연시켰다. 스탈린은 소련 최고지휘부가 주요 전선에서 4개 사단을 서울지역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고 집행됐다면, 서울 인근의 전세를 근본적으로 바꿀수 있었다고 생각함(257 주 30, 스탈린이 마트베에프와 스티코프에게 보낸 지시, 1950년 9월 27일,
АПРФ, ф.3, оп.65, д.827, л. 90-93)

여기서 7월초 중국지도부가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경고를 소련이나 북한이 제대로 감안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경고를 완전하게 무시했다. 조선노동당 서기였던 임은과 정전회담의 조선측 대표였던 이상조의 기억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직접 김일성에게 인천상륙을 저지해야 한다고 환기시켰다. 그러나 임은은 “김일성이 마오쩌둥의 경고를 무시했으며,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면서, 이사실을 비밀에 부치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Chen Jian,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p.273, 275)

한편 스탈린은 스티코프가 “적극적으로 조선의 지도자들에게 의견과 건의를 하지 않아 조선지도자들이 우왕좌왕 하도록 했다.”고 하면서 “조선의 전황에 대한 평가를 모스크바에 전혀 보고하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 필요한 어떤 방법이나 건의도 하지 않아 모스크바의 결정을 방해 했으며, 조선 지도자들이 여전히 38선과 그 북부지역의 공화국의 방어에 대한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아서, 남조선에 있는 병력의 철수 계획도 세울수 없도록 만들었다”면서 마트베에프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Petrov, “Soviet Role in the Korean War Confirmed”, pp.60-61)

이렇게 보면 스탈린은 9월 중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후 작전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이 4개사단을 서울로 보내 방어하라고 한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당시의 통신상황이 좋지 않은 이유도 있었을 것이고, 북한군 전선사령부가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면서 4개사단을 차출하여 서울로 보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북한군이 이런 작전적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스탈린의 방침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스탈린 자신이 조선에서 소련 군사고문단이 어던 상황에서도 38도선을 넘어가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군사고문단은 북한군의 전선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모스크바에 적시적절 정보롤 제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1. 인천상륙작전직후 스탈린은 마오쩌뚱에게 전문을 보내 조선에 군대를 파병가능여부를 확인함(Chen Jian,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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