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33, 제3차 전역이후 휴전협상관련 마오쩌뚱의 전략적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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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모택동 스탈린.jpg

중국이 50년 12월 초에 휴전을 위한 5개조항을 연합국측에 제시했다는 내용을 정리한 적이 있다. 제3차 전역이 시작되지 전의 조건이었다. 제3차 전역이후 1951년 1월 11일 유엔 3인위원회에서 휴전을 위한 제안이 만들어지고, 13일 유엔총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이를 즉각 거부했다.


<3인위원회>

12월 12일에 인도가 아시아·아프리카 13개국의 지지를 받아 유엔총회에 한국 휴전의 기초 조건을 조사하기 위한 3인위원회를 구성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자 미국이 이를 지지

3 인위원회는 당시 총회의장이었던 이란 대표 엔테삼(Entezam,N.)·캐나다 대표인 피어슨(Pearson,L.B.), 그리고 인도 대표인 라우(Rau, B.N)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중공과 접촉하기 시작

정전을 위한 유엔3인위원회의 중공 정부 접촉이 실패, 이 사실이 총회의 정치위원회에 보고. 중공이 한국전의 정전에 거부하는 태도를 취한 것은 당시 전황이 유리하였기 때문


한편, 3인위원회의 제안에 대해 미국은 난처한 입장에 직면하게 됨, 이 제안에 동의하면 ‘한국의 신뢰를 상실’하고 ‘의회와 여론의 질타’를 당하고, 반대하면 ‘유엔에서 다수의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

결국 미국은 이 제안을 지지하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중국이 이 결의안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338, 주58)

중국의 입장에서 이 제안은 전략적으로 매우 유리했다. 천지엔의 지적처럼 즉각 휴전에 돌입하면 지원군은 합법적으로 38선 이남에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휴전에 실패하더라도 재진격을 위해 부대를 정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338, 주 59, Chen Jian, “China’s Strategy to End the Korean War” Paper for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Hong Kong, January 1996)

그러나 마오쩌뚱과 스탈린은 유엔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 이는 애치슨이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했고, 중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정전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했다.

마오쩌뚱과 스탈린이 왜 이렇게 유리한 조건을 거부했는지는 추가적인 확인과 연구가 필요하다. 이부분에 대한 연구성과는 별로 없어 보인다. 이제까지 살펴보면 마오쩌뚱이 적극적으로 휴전을 거부하겠다고 밝히면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동의를 구했다고 한다(이병주 교수 논문).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탈린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하는 것이다. 스탈린은 정전협정의 체결에 부정적이었다. 한국전쟁에서 정전협상이 질질 끌게 된 것은 스탈린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이 유엔3인위원회의 제안을 거부한 것은 전략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마오쩌뚱이 그안을 그대로 수용했다면 중공군은 펑더화이가 생각했던 것 처럼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황은 급변해서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1951년 1월 25일부터 반격작전을 실시했다. 중공군은 제대로 정비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전투를 강요당했다.

결국 제2차 전역이후 제대로 정비를 하지 못한 중공군은 지속적으로 전투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중공군의 제3차 전역부터 5차 전역까지는 군사와 정치의 관계가 어떻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맥아더는 국가정책에 군사가 간섭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실패했고, 마오쩌뚱은 정치가 군사에 간섭하면서 실패한 예를 보여주었다.
(마오쩌뚱의 군사에 대한 개입문제는 논문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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