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32. 제3차 전역 중지와 관련한 펑더화이와 소련 북한간 의견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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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더화이는 1951년 1월 8일 지원군에 진격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하고 부대를 정비하라고 명령했다. 마오쩌뚱과 스탈린은 펑더화이의 조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조선과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소련의 고문들은 모두 강력하게 반대했다. 1월 9일 오전, 중국주둔 소련군 총고문 자하로프는 해방군 총참모부 작전실에 찾아와서 불만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전쟁에 승리하고서도 적을 추격하지않고, 승리의 성과를 확대시키지 않는 부대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이것은 적들에게 휴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니에룽쩐이 설득했지만 자하로프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펑더화이도 현장에서 조선 지도자와 소련대사의 반대에 봉착했다. 신임대사 라주바예프는 지원군이 계속해서 남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펑더화이에게 면담을 요구하면서 지원군의 결정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으며, 마오쩌뚱과 스탈린에게 직접 펑더화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의견 충돌은 중소 양국의 최고위층에 전달되었고, 다시 마오쩌뚱과 스탈린의 협조를 통해 겨우 해소될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펑더화이의 결정을 지지했다.

북한의 발발이 거세자 스탈린은 북한이 앞장서서 추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중국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지원군은 38선 이북과 동서해안에 대한 통제를 담당하고, 북한군이 계속 남쪽으로 추격을 하는 것이다.

김일성은 이런 상황에서 정비기간의 축소를 요구했다. 마오쩌뚱은 펑더화이에게 전문을 보내, 계속 남진할때, 인민군을 한강이남의 제일선에 배치하고 지원군은 인천과 한강이북으로 철수해 부대를 정돈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남쪽으로 진격하는 인민군은 조선정부가 지휘하고, 지원군은 38선 이북의 방어임무를 담당하라고 지시했다,(337. 주55)

인민군이 독자적으로 깊숙하게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김일성은 어쩔 수 없이 진격을 멈추고 부대를 정비하자는 펑더화이의 주장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1월 14일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와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2-3개월의 정비와 휴식을 거친 후에야 남조선 문제를 해결하고 최후 승리를 보장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1950년 6월부터 9월 사이에 인민군이 저질렀던 실수를 다시 저지를 수 있다”(337. 주56. 마오쩌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1년 1월 15일, АПРФ, ф.45, оп.1, д.337, л.1-3)

제2차 전역과 3차 전역의 과정을 보면 중국과 소련이 당시 한국전쟁의 목표를 한반도 전체 석권이 아닌 38도 선상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제까지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시 전쟁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한 검토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제3차 전역으로 한국전쟁의 기초적인 목표는 달성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이 참전하면서 한반도 전체를 석권하는 것을 전쟁목표로 삼았을까하는 점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물론 마오쩌뚱과 스탈린은 ‘미군을 남조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하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삼았다는 기록(338, 주5)이 있으나 그 실제 내막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스탈린의 입장에서 볼 때도 중국이 한반도에서 미군을 완전하게 몰아내는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북한이 완전하게 중국의 영향력하에 들어가게 되면 소련이 입장에서도 중국이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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