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21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위한 준비(1950년 6월 말부터 8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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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의 1950년 6월 30일 한국전의 장기화 예상

1950년 6월 조우언라이는 차이청원을 대사관 정치참사 명의로 조선에 파견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 미국 육군이 이미 조선에 참전하고 있으며 미국은 더 많은 국가들을 규합해서 참전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전쟁의 장기화는 불가피하며, 이는 전체 판국에 영향을 주는 복잡한 문제를 동반할 것이다.”(252, 주20, 주은래연보(1949-1976) 상권 p.51)

  1. 중국정부의 한국전 개입을 위한 사전 준비

“7월 초 중국정부는 동베이군구에 소속된 200명의 조선족 간부를 집결시킨 후, 조선으로 보내 이들이 인민군 간부의 전투능력을 향상시키도록 하는 방안에 동의했다. 동시에, 소련 정부가 요청한 장춘철로와 중국 영공을 통한 조선으로의 군용물자 수송 요청에 대해서도 동의했다. “(252)

미국이 개입한 후 ‘중국지도자들은 조선의 전투상황에 대해 더욱 중시하면서 상응하는 군사적 배치를 진행했다. 7월 7일과 10일 마오쩌뚱의 건의에 의해 중앙 군사위원회는 중난하이 쥐런탕에서 국가보위를 위한 1차 토론회를 개최해 ‘동베이변경을 보호하기 위한 결정’을 내려 4개군과 3개포병사단 그리고 3개 공군여단으로 구성된 총 25.5만명으로 구성된 동베이변방군을 구성하고, 8월 5일까지 동베이에 집결시킬 것을 결정했다’(253, 각주 20) 7월 중순 떵화 휘하의 13병단에 소속된 38, 39, 40, 42 군이 동베이지방에 집결했다.

션즈화는 당시까지 중국이 파병문제를 결정하지않았다는 입장이다. 그 이유는 “7월 초 조우언라이가 이미 로쉰에게 중국이 병력을 파견하여 조선을 도와주는 문제에 대해 건의했지만, 그것은 미국군대가 38선을 넘을 때라는 전제조건이 있었으며,”(253) 당시 북한군은 남쪽을 향해 신속하게 진군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션즈화의 이런 해석은 논리적으로 옳지 않다. 이미 조우언라이는 6월말이 전쟁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고 그런 예측에 따라 동베이군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션즈화가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는 미국군대가 38도선을 넘을 때라는 조우언라이의 생각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측의 근거이지 군대 파병의 결정과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전장상황의 변화와 함께 파병에 대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8월 4일 인민군의 공격이 저항에 부딪히고 있을 때, 중공중앙위원회는 정치국회의를 개최했다.

마오쩌뚱은 여기에서 “만약 미제국주의자가 승리하면, 의기양양해서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조선을 돕지 않을 수 없지만 반드시 지원군 형식으로 도와야 한다. 시기는 당연히 상황에 따라 선택해야 하지만,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우언라이도 “만약 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압박한다면, 이것은 평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불리하며, 그들의 기세도 드세질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의 역할을 강화해야 하며, 중국의 역할이 강화된 이후에는 국제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원대한 사고를 해야 한다.”(253, 각주 24)

여기서 주언라이가 언급한 “중국의 역할이 강화된 이후에는 국제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국제적인 변화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국제적인 변화라는 것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중국의 역할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황이 점차 복잡해지자 중국은 ‘8월 말부터 9월 초 사이에 다시한번 대규모 병력을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마오쩌뚱은 4개군이 배치되어 있는 동베이지방에 추가적으로 다시 8개군을 추가로 배치하는 것을 고려했다.(254, 주 25, 건국이래모택동문고 제1책, p. 454, 469, 485)

8월 중순 이미 중국은 한국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를 위해 3년간의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254) 8월 27일 마오쩌뚱은 각 지역의 책임자들에게 현 시국과 앞으로의 3년계획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연구하여 11월 또는 12월에 개최될 당의 4중전회와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에서 토론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255, 주 26)

상기 내용을 정리해 보면 중국은 6월 말에 이미 한국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동베이지역에 12개 군 규모의 병력을 집결시켰으며, 3년간의 전쟁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 매우 적극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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