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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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와 몇 줄의 문장으로 쓴 서문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데미안'과 '파우스트'와 '설국'을 읽었고 절에서 밤새 1080배를 했으며 매일 해질 무렵이면 열 바퀴씩 운동장을 돌았고 매순간 의미 있게 살지 않는다면 그 즉시 자살한다는 내용의 '조건부자살동의서'라는 것을 작성해 책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시를 쓰는 여학생을 맹목적으로 좋아했고 초콜릿 맛이 나는 '장미'를 피웠으며 새벽 2시 비둘기호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치는 친구를 배웅하느라 '나폴레옹'을 마셨고 가출에서 돌아온 또 다른 친구가 들려준, 너무나 예쁘다는 강릉역 앞 창녀촌의 여자를 혼자 상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 밤이면 고향집 2층 지붕 위에 올라가 누워 있곤 했다. 처음에는 내가 아래에 있고 별들이 위에 있지만, 이윽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나는 그 위치가 바뀌어 내가 위에 있고 별들이 아래에 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그 별들의 바다 속으로 빨려들게 된다.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별들만이 가득한 바다. 또 나는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지, 그게 너무나 궁금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 마음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 텅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다.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빠져들었고 아파야만 한다면 기꺼이 아파했으며 이 생에서 다 배우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텅 빈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그건 슬픈 말이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면서 나는 내가 도넛과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빵집 아들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도넛으로 태어났다. 그 가운데가 채워지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두 개의 글을 읽는다. 하나는 이배의 시 '경정산에 올라'이고 하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딸 쓰시마 유코가 쓴 짧은 소설 '꿈의 노래'다

여러 새들 높이 날아 가뭇해지고
쓸쓸하던 구름 하나 한가롭게 떠 가니
마주 보아도 서로가 싫지 않은 건
이제는 경정산만 남아 있구나

아이들을 잃고 서럽게 울다 눈이 먼 어머니의 노래. 그리운 안주야. 호-야레호-. 그리운 즈시오. 호-야레호-.그리워를 영어로 말하면, 아이 미스 유, 라지. 내 존재에서 당신이 빠져 있다. 그래서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라지. 안나. 호-레, 호-레의 여동생 신도, 너도. 모두 그럴 테지......

내가 사랑한 시절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 안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들, 지금 내게서 빠져 있는 것들...... 이 책에 나는 그 일들을 적어놓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일들을 다 말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차마 말하지 못한 일들은 당신이 짐작하기를. 나 역시 짐작했으니까. 이제 경정산만이 남은 이백에게 마주 보아도 서로가 싫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리워라는 말에는 지금 내게 당신이 빠져 있다는 뜻이 담겼다는 걸 짐작했으니까. 당신도, 나도,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사람이니까. 호-야레호, 내게는 이제 경정선만이 남아 있을 뿐이니까. 호-야레호-. 당신도, 그 어떤 사람도 결국 그럴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는, 도넛과 같은 존재니까. 이제 다시는 이런 책을 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삶을 설명하는 데는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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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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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좋은 글과 소재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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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itsuda 태그를 사용해주셔서 고맙습니다 1 BOOK 에어드랍이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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