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6-4 스탈린의 사망과 소련지도부의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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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하게 끌던 정전협정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소련의 입장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 계기는 스탈린의 사망이었다.
스탈린 사후 한반도 문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몰로토프로 알려지고 있다. 몰로토프는 외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자 마자 한국전쟁의 종결을 위한 초안을 작성했다. 베리야 역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조속한 해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472, 주 40, F. Orlandi, “The Alliance; Beijing, Moscow, the Korean War”)

모스크바가 정책을 전환한 이유는 미국과의 냉전적 대응상황에서 최악의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션즈화는 그 근거를 ‘주복’과 ‘플레샤코프’의 저서에서 찾고있다( V. Zubok and C. Pleshakov, Inside the kreamlin’s cold war, p. 154)

스탈린 사후 소련이 한국전쟁에 관한 정책방향이 논의된 것은 제4차 최고소비에트 대회로 보인다. 말렌코프는 “현재 논쟁중이거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관련 국가 간 공동협상을 기초로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은 미국과의 관계를 포함해 우리와 모든 나라와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 평화를 유지하는데 관심이 있는 국가들은 현재와 미래에 소련이 단호한 평화적 정책에 마음을 놓아도 될 것이다.”고 말했다.(473, 주46)

3월 18일 몰로토프는 베리야와 말렌코프에게 자신이 초안한 조선전쟁에 대한 새로운 정책방향을 제출했다(473, 주 47, 몰로토프가 말렌코프와 베리야에게 보낸 전보, 1953년 3월 18일, V. Zubok and C. Pleshakov, p.155)

소련이 한국전쟁의 향방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3월 19일 마오쩌뚱은 체코슬로바키아 고트발트 대통령 장례식에 참가한 저우언라이에게 소련측과 정전협상에 관한 논의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소련은 3월 19일 같은날 한국전쟁의 정전에 관한 새로운 방침과 이를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확정했다. 인민위원회 회의에서는 중국과 북한에게 전쟁포로 송환문제에 대한 지시를 보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마오쩌둥과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현재의 정치적 특성과 우리 3국인민의 가장 절한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개선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소련, 중국, 북한 3국인민은 세계평화를 공고하게 하는데 관심이 있으며,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조선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1. 클라크 장군이 2월 22일 제기한 부상당한 전쟁포로의 교환 문제에 대해 김일성과 펑더화이가 긍정적인 회신을 하도록 요구한다. 2. 김일성과 펑더화이가 회신을 발표한 후, 중국의 권위있는 대표(가장 적합한 인물은 조우언라이 동지)가 베이징에서 성명을 발표하여 전쟁포로 교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사가 있음을 표시하고 한반도의 정전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시기가 이미 도래했음을 보증한다. 3.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베이징에서 성명으로 발표하는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 김일성이 평양에서 정치적 성명을 발표하는 동시에,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 김일성이 평양에서 정치적 성명을 발표하여, 중국대표의 성명이 정확하고 정당하고 이를 전적으로 지지함을 표명한다. 4.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 또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베이징과 평양에서 성명을 발표한 후 곧바로 소련외교부가 베이징과 평양의 입장을 완전히 지지한다고 표명한다. 5. 위에서 언급한 네가지 조치에 보조를 맞춰, 소련대표단이 뉴욕의 유엔총회에서 필요한 모든 행동을 취해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정책의 실시를 지지하고 추진한다,”고 하면서 정전협정회담의 책임있는 쌍방대표가 판문점에서 회담을 재개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함께 인민위원회의는 중국과 북한이 발표하게 될 정전회담 재개에 관한 제안과 성명서에 대해 비신스키에게 책임을 부여했다. (475-6, 주49, 소련인민위원회회의 1953년 3월 19일, АПРФ, ф.3, оп.65, д.830, лл.60-71)

1953년 3월 19일의 소련인민위원회회의의 내용은 스탈린이 사망한이후에도 소련은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에 대한 확고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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