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3-4 북한과 소련의 경제관계 강화 그리고 북한과 중국의 우호조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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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는 1960년 전후에 북한이 중국에 일방적으로 경사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북한은 중국에 더 많은 의존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소련에게 경제적으로 더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소련은 경제력과 원조능력에서 중국을 앞서고 있었다.
1959년 3월 17일 북한과 소련은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했다. 소련은 북한에 5억루블에 해당하는 각종 기계설비와 기술원조를 제공했으며, 20만 킬로와트의 화력발전소 화학제품, 마방적공장, 및 김책제철소와 평양견직물공장 건설에 협조하기로 했다.

1960년 10월 소련과 북한은 북한정부가 상환해야 할 7.6억루블 상당의 차관 면제협정에 서명했다.

12월 24일 양국정부는 경제협력 및 무역에 관한 2개협정에 서명했고 소련은 강철공장 화력발전소, 정유공장의 신설 혹은 증설을 지원하고 이후 5년동안 양국간 무역액을 80% 확대시키기로 계획했다.

1961년 5-6월 사이 소련의 제1부수상 코시긴이 북한을 방문했으며 이를 계기로 소련과 북한 관계는 정점에 달했다. 이는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균형을 잘 고려하여 양쪽모두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과 북한의 밀접한 경제 관계는 중국을 자극해서 북한에 더 접근하도록 만들었다.

6월 24일 북한은 김일성이 당과 정부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발표했으며, 26일 북한 외무상은 챠오사오광 중국대사를 불러 북한이 소련과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 체결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을 주도적으로 설명

북한과 소련의 조약체결은 1959년에 이미 합의했지만, 후르시쵸프의 북한 방문이 지연되면서 서명이 연기되었던 것임.

차오샤오광은 이기회에 중국과 북한이 조약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28일 김일성은 챠오사오광을 접견한 자리에서 조약체결을 전전으로 찬성한다고 하면서 소련 방문후 직접 베이징으로 가서 조약을 체결하겠다고 제안

다음 날 중국은 김일성이 소련 방문후 7월 10일 중국을 방문해 <우호협력원조조약> 체결을 열렬히 환영한다고 북한에 통보함(449, 주 246, 인민일보 1961년 6월 8일)

북한은 소련과 체결한 조약 초안을 중국에 건냈으며, 중국은 군사동맹의 성격을 띠는 내용을 포함시킴. 이에 북한은 동의함,

김일성은 7월 10-15일 중국을 방문함, 션즈화는 중국과 북한의 우호협력조약이 동맹조약의 형식을 빌려 지원군의 철수로 조성된 38선의 군사방어 분야에서의 압력을 해소할 수 있었다고 평가

그러나 이시기 중국과 소련이 북한에 적극적으로 접근한 것은 김일성의 등거리 외교의 성과였다. 그점에 대해서는 션즈화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중국과 소련에 대한 등거리 외교를 통해 김일성은 당과 정부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미 사회주의 진영에 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음을 느꼈다는 것이다. (451)

중국은 당시 김일성의 등거리 외교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선노동당 제4차 당 대표대회는 “3차 대회에서 제출한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우호적 단결임무가 이미 완성되었으며, 특히 이번 김일성의 소련과 중국 방문은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을 강화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작용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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